하나님이 기쁘게받으시는 찬양!!!

[스크랩] 지금 교회음악은 어디로 가고있나?

이마에 2011. 2. 17. 18:58

이 글은 2003년 6월 28일 크리스챤 한국 신문에 게재되었던 내용입니다.



지금 교회음악은 어디로 가고있나.

고 덕 환

선교 100년을 훌쩍 넘는 이 시점에 교회음악도 현 시대에 맞는 변화와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과거에는 1세기가 걸려 연구 개발되던 과학의 발전 속도가 10년이 못되어 이루어지는 초 고속시대를 맞고있다.

달을 뒤로하고 화성탐사에 나선지 오래이고, 인터넷의 발달로 2억만리 타국도 지척이 되어 동시대를 사는 하나의 촌락을

공유하고 있으며, 유전자를 복제하여 소위 리플리컨트(인조인간)를 대량 생산해 내는 일은 그저 시간에 맡겨진 상태이다.

비단 과학과 의학 뿐 아니라 철학, 가치관, 이념조차도 물질과 실용주의에 떠밀려 그 구조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교회 역시, 나날이 바뀌어 가는 세상 풍조에 그저 빗장을 걸어 잠글 수만은 없어 세상의 변화를 분별치 못하고

경계를 조금씩 늦춘 사이, 세속의 거센 물결은 걷잡을 수 없으리 만치 홍수처럼 밀려들고 말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불어닥친 교회음악의 변화는 한국교회의 정서를 뒤바꿀 만큼 가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90년대 이후 CCM(Christian Contemporary Music)의 도약은 세속문화를 우려하는 기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다.
70년대 미국의 Spiritual song, Gospel song을 주축으로한 복음성가는 교회음악의 틀과 테두리 안에서 선별적인 음악양식을 가지고 발전한데 비해서, CCM은 Pop, Rock, ballad, Hip-Hop Heavy metal 에 이르는 현대의 모든 대중음악의 장르를 이용하고 있다.

하늘에서 음악을 관장하던 루시퍼가 하나님과 비겨보리라 하여 쫓겨나 천사의 3분의 1을 이끌고 땅으로 내려와

그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성결을 혼미케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일을 막는 것이다.

이것은 영의 음악 즉, 하나님이 만드신 음악을 육과 혼의 음악으로 유혹하는데,

복음송의 많은 부분과 CCM(Christian Contemporary Music)의 음악은 육이 함께 드러나는 음악이요, 명상음악이니,

뉴 에이지 음악이니 하는 것들은 혼이 담긴 음악이다.
일부 복음성가와 CCM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보다는 전도나 사람들의 신앙을 고취시키는 목적으로, 불신자가 들어도 거부감이

들지 않을 세속의 멜로디와 리듬을 차용하고 있어서 가사 없이 음악만으로는 교회음악인지 대중음악인지 구별하기가 어렵다.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권면, 신앙의 나눔,

위로와 교통이 목적이므로 태신자 전도집회나 이웃초청 전도용으로는 좋으나, 하나님을 향한 공 예배에는 사용할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예배시에 하나님을 향해서 '예수 믿으세요~' 라는 복음가를 부를 수는 없다는 이치이다.

명상음악이니, 뉴 에이지 음악이니 하는 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비워서 정신을 맑게 하는것 같으나, 화성의 3음을 의도적으로

탈락시키며 잦은 9,11,13화성들을 사용함으로 공허하고 허전한 빈소리를 울리게 하여 의욕이 사라지고 염세적으로 몰아가므로

사상이 사라진 무미 건조한 삶을 살게 유도한다.

복음성가나 CCM은 빠른 템포와 잦은 박자의 분할과 엇박, 변박의 남용,

화성의 TDS의 기능을 무력화하는 5도화성-4화성으로 진행시키고, 화성의 3음을 의도적으로 중복시켜서

투쟁과 강한 인상을 심기도 하고 악기의 속성변화 즉, 건반악기를 타악기처럼 누르는 개념이 아닌 두들기는 개념으로 변화시키고,

타악기는 드럼의 경우에도 클래식의 팀파니처럼 강조되는 주요부분에만 국한하여 사용하지 않고,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두들김으로 리듬에 주술적으로 빠져드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음악은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것인데, 그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면,

속히 물리치고 거부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러한 CCM을 대중음악의 대안이 아닌 교회음악의 대안으로 자리 매김 하지 않도록 하려면 여러 가지 대안이 있겠으나,

여기에서는 교회음악의 교과서 격인 찬송가의 문제만을 거론하고자 한다.

제3의 장르는 기존 틀에서 만족을 할 수 없어 나타나는 현상인데, 특히 요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음악과 교회음악의 깊은 격차를

좁히는데 실패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문제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첫째, 다양성의 결여이다.
통일 찬송가에는 그레고리안 성가에서부터 20세기후반의 근대음악까지 존재하기는 하나 현대의 급속한 변화에 교계와 찬송가 공회 등에서 너무 늑장대응을 했다.
100년 넘도록 15회의 발행을 거듭하던 찬송가의 변화바람이 1983년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있는 통일 찬송가이후

20여년간 소위 신제품을 개발해 선도해 나가는 일에 소홀했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수용할만한 여러 내용의 복음적 가사의 찬송이 없어

새로운 가사와 곡을 개 교회의 신규제작 혹은 복음성가와 CCM등에서 찾으려는 욕구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둘째, 적극적인 토론과 대화와 교육의 장이 없었던 것이다.
젊은이들의 욕구와 가치기준의 변화를 토론하고 서로를 끌어안을 공간 없이 서로를 반목하기만 했지 대안을 말할 기회와

의견 수렴의 장이 없었다.
교회음악은 무엇인지, 어떤 찬양을 어떻게 불러야하는지 하는 교육조차 기회가 한정적이었다.
이런 폐단은 전문성이 결여된 교회음악지도자와 신학적 바탕이 얕은 음악인에게 교회의 음악을 맡기게되어 절름발이

교회음악을 양산해 냈다.

셋째, 새로운 이슈가 거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부 교회음악가들의 광야 외침 같은 소리에 교회와 교회음악인들이 수동적으로 대응하므로 도전적 목표없이 표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현대음악의 도입이나, 한국의 가락과 장단을 이용한 토착화라든지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창작의 장려 등을 권장하며

키워내지 못한 결과이다.
창작 가요제, 창작 가곡제, 창작 동요제, 창작 복음성가는 있는데 한국인들에 의한 한국찬송가 공모가 미흡하였고,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얻어지는 발전적 목적달성에 소홀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양하고 차원 높은 신선한 명곡들을 양산할 수 있도록 하는 창작의 기회를 높이고, 교회음악을 진지하게 토론하고

교육하며 대화 할 수 있는 공간의 활용과 교회음악의 새로운 발전적 목표를 제시할 수 있는 전문적인 교회음악 전문단체들에게

교계와 교회 그리고 일천만 성도가 따뜻한 격려와 관심, 그리고 적극적인 후원자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소원한다.

출처 : 성가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글쓴이 : 요나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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